• 2025. 5. 5.

    by. goodppls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단순한 음향이 아닙니다. 종은 시간을 알리고 사람들을 모으며 때로는 신성한 제례를 알리는 수단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이러한 종을 제작한 장인이 바로 '주물장(鑄物匠)'입니다. 주물장은 단순한 기술자가 아닌 국가와 왕실, 사찰의 의례를 가능하게 한 금속공예의 정점에 선 장인으로 예술성과 과학성을 함께 지닌 존재였습니다. 본 글에서는 주물장의 정의, 조선시대 종의 종류와 용도, 전통 주조 기술, 제작 과정, 문헌 속 기록, 그리고 오늘날의 계승 방식까지 종합적으로 살펴봅니다.

     


    목차

     


     

    국가를 위해 종을 만든 사람 - '주물장'의 역할

    1. 주물장이란 누구인가?

    '주물장'은 구리, 주석, 납 등 다양한 금속을 녹여 틀에 부어 기물을 제작하는 전통 장인으로 특히 종, 제기, 향로, 불구, 총통 등의 국가 의례용 또는 민간 공예품을 만드는 데 중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이 중에서도 종 제작은 가장 복잡하고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한 작업으로 소리의 울림, 진동의 조화, 음향의 지속성 등 과학적 지식이 결합되어야 했습니다. 종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주물장은 대개 도제식으로 전수되었으며, 지역에 따라 기술의 차이가 있었고 고급 장인은 궁중이나 왕실 사찰과 직접 연계되기도 했습니다. 주물장은 단순히 기능인이 아니라 음향, 공예 과학을 융합한 예술공장의 장인이자 고도의 실무자였습니다.

     

    2. 조선시대 종의 종류와 용도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종류의 종이 존재했고, 각각의 용도에 따라 모양과 크기, 음색이 달랐습니다. 대표적인 종의 종류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범종은 사찰에서 새벽과 저녁 예불, 불공, 의식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가장 크고 무게가 나갔습니다. 둘째, 종묘종은 왕실 제례에서 음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신성한 의미를 지닌 종으로, 정확한 음률이 요구되었습니다. 셋째, 관청종은 도성의 관아나 문루에 걸려 있어 시간과 순찰, 화재 등을 알리는 '경고용 종'이었습니다. 넷째, 사찰의 소형 종이나 손종(手鐘)은 법회나 요식 행위에 사용되는 휴대용 종으로 정교한 공예미가 특징이었습니다. 이렇듯 종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국가와 종교, 민간 생활을 연결하는 시간의 매개체였습니다.

     

    3. 전통 종 제작의 공정과 기술

    전통 종 제작은 수십 단계에 이르는 정교한 공정이 필요합니다. 일반적인 제작 절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 단계는 설계와 도면 작성으로, 음높이, 직경, 두께, 문양 등을 정확히 도식화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주형 제작으로, 심형(內型)과 외형을 점토, 모래, 가마니, 짚 등을 사용해 정밀하게 제작합니다. 세 번째는 금속 제련으로, 구리 78~80%, 주석 20~22%의 비율로 합금하며, 때에 따라 소량의 납이나 아연을 넣기도 했습니다. 네 번째는 주입과 냉각 과정으로, 용융 금속을 주형에 부은 후 며칠간 서서히 식혀 금속의 밀도를 안정화시킵니다. 다섯 번째는 탈형 및 가공으로, 주형을 깨고 나서 표면을 갈고 문양을 조각하며, 종의 내부 음선을 다듬습니다. 마지막 단계는 음조 조율로, 종을 실제로 쳐보며 망치로 두께를 조절해 정확한 음높이를 만들어냅니다. 이 전 과정은 대게 장인의 숙련도와 감각에 의존하게 되며 한 자루의 종 제작에는 수개월이 소요되기도 했습니다.

     

    4. 종소리의 과학과 미학

    종소리는 단순히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아니라 공명과 진동이 만들어내는 음향 예술입니다. 전통 종은 한 번 타격하면 30초 이상 울림이 지속되는 잔향을 목표로 하며 이를 위해선 내부 음공의 설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종의 유곽(乳廓)이라 불리는 둥근 돌기가 종소리의 파장을 분산시키고, 음선(音線)이라 불리는 얇은 홈은 진동의 방향을 조절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울림의 균형'이 만들어지며, 여기에 종의 소재와 두께, 직경, 타격 부위가 복합적으로 작용합니다. 주물장은 종소리를 미세하게 조정하기 위해 수차례 시험 타격을 반복하고, 최종적으로 자신의 귀와 감각만으로 음을 조율합니다. 이 과정에서 장인은 과학, 예술, 감성을 통합해 내는 전통 장인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5. 문헌 속 주물장의 기록과 위상

    주물장의 역할은 다양한 고문헌 속에도 남아 있으며,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기술한 문헌에서도 기술의 가치를 강조한 대목이 등장합니다. 예컨대, 정조가 편찬한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는 주물장을 포함한 기술 장인을 '국가의 실용 지식인'이라 언급하며, "소리의 진동이 오래 머무는 것은 그 사람의 정성과 손끝의 기술에서 비롯된다."는 문장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사례편람(事例便覽)>에는 관청에서 주물을 제작할 때 필요한 절차와 기술자의 관리 방식이 정리되어 있어, 국가 기술직으로서 주물장의 위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궁중 기록이나 지방 관아 보고서에도 '범종 제작을 위해 주물장 아무개를 불러들이라'는 식의 명령문이 자주 등장하며, 중요한 종 제작에는 지역 고수 장인을 직접 초빙한 사례가 많았습니다.

     

    6. 현대의 계승과 무형문화재로서의 주물장

    오늘날 주물장은 국가무형문화재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종 제작뿐만 아니라 전통 유기 주조, 제기 제작, 종소리 조율 기술까지 전승되고 있습니다. 국내에는 일부 장인들이 사찰 범종, 국악기 부속품, 기념 종, 축제용 공예 종 등을 제작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손주조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육기관과 협력해 전통 금속공예 체험, 청소년 대상 장인 강의, 현대 미디어 협업 등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며 기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디지털 사운드 기술과 접목해 종소리의 주파수 분석과 디지털 보존이 시도되기도 하며, 현대의 주물장은 전통을 기반으로 과학과 미디어, 공공예술로의 확장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한 자루의 종을 만들기 위해 수백 번 두드리는 그 손끝에는 시대를 울리는 장인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입니다.

     


     

    맺음말

    1. 주물장은 조선시대 종과 의식 기물을 제작한 금속공예 장인으로 예술성과 기술을 겸비한 전문가였습니다.
    2. 종 제작은 합금, 주형, 음조 조율 등 고난도 기술을 요하며 종소리는 과학과 감성의 집합체였습니다.
    3. 오늘날 주물장은 무형문화재로 계승되어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문화유산으로서 그 가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